11월의 끝자락. 겨울은 한층 깊어져 늦은 밤의 공기는 매섭게 차가웠지만, 첫 모임의 열기는 마치 작은 봄처럼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지역 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축제기획단의 첫 만남. 다양한 삶의 결을 지닌 이들이 한데 모여 한겨울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연말의 끝과 새해의 문턱 사이, 차가운 계절을 녹인 것은 사람들의 눈빛과 마음속에 타오르는 열정이었다. 한 주, 또 한 주가 지나며 각자의 아이디어로 축제 기획안을 내놓고, 우리는 조별로 나뉘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엔 서로 낯설었지만, 낯선 얼굴들 속에서도 묘한 친근함과 희미한 인연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조용한 기운은 어느새 운명처럼, 마음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내가 먼저 조심스레 혹시 다른 교육모임에 함께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같이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예상보다 그는 쉽게, 그리고 기쁘게 응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인들까지 기꺼이 초대하며 모임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그 이후 나는 일정과 세부 계획을 조율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이어갔고, 우리 둘은 점점 더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고,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다가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마치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걱정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곳은 없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너로 인해 너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참된 삶은 언제나 만남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그날 이후의 우리도, 그렇게 ‘참된 삶’으로 스며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회의가 끝난 뒤 잠시 나누는 차 한 잔에서 시작되었고, 어느새 식사 자리로 이어졌으며, 식사 속 대화는 또 다른 약속을 불러왔다. 함께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맛을 나누고, 술 한 잔에 마음을 풀며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생맥주로 가볍게 저녁식사를 했고, 외국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와인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막걸리 한 잔에 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일생 동안 경영하는 일의 70%는 사람과의 일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길이다.”
— 신영복, 『처음처럼』
“사랑을 하면 삶은 모험의 연속이 되고,
만남은 순간순간 아찔한 경이가 된다.”
— 프랑수아 클로드, 『꾸뻬 씨의 사랑여행』
그 말처럼, 우리의 일상은 특별한 모험이 되었고, 평범한 순간조차 작은 경이로움으로 반짝였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삶에 스며들며,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따스한 봄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언 땅을 뚫고 꽃이 피어나듯, 우리의 시간도 서서히 피어나고 있다.
“어느 누군가의 하루가 궁금해진다는 건,
그 사람이 어느새 소중해졌다는 뜻이다.”
그 말처럼, 나도 어느새 그의 하루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스며들 듯 다가왔고, 낯설던 얼굴은 어느 순간 익숙한 미소가 되었다.
삶은 수많은 만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만남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해간다. 첫짝궁, 첫사랑, 첫사수… 마음을 두드리는 설레는 ‘첫’들이 쌓여 결국 인연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삶이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우리는 또 어떤 만남을 마주하게 될까. 그 만남은 어떤 계절을 닮아 있을까. 분명한 건, 봄은 매해 다른 모습으로 오듯, 우리의 삶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언제든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지금,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를 떠올리며, 그 따뜻함 속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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