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마음에 스며든 첫 문장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마치 오래된 책갈피 속 사진 한 장을 꺼내든 느낌이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또렷했고, 처음이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햇살이 기울고 초저녁의 이른 밤,
갈색빛 머리결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갓 한 파머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은 바람을 머금은 듯 자연스럽게 흘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빛들이 머리카락 사이를 통과하며 금사처럼 반짝였다.
눈망울은 사슴처럼 동그랗고 맑았다.
마치 질문을 던지기 전부터 대답을 알고 있는 듯한 눈.
그 안에는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 속에 떨림이 있었다.
그 눈은 사람을 읽고, 기다릴 줄 아는 눈이었다.
입매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있어
그 존재 자체가 따뜻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코는 조형적으로 단정한 선처럼 조용히 자리했고,
그 모습 전체는 단순한 인상을 넘어
마치 어느 화창한 정원 한가운데 선 나무처럼
주변의 공기를 정화하고, 침묵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조용히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시.
그 사람은 그렇게, 내 마음에 첫 문장을 남겼다.
마음이 말을 걸다
처음엔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한 번 스친 인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화의 한 조각, 스친 표정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흐릿했던 인상은 시간이 흐르며 또렷해졌고,
문득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람의 말투에는 리듬이 있었고,
그 리듬은 내 마음의 고요에 조용한 물결을 일으켰다.
처음엔 단순한 예의였던 안부 인사가
어느새 습관이 되고, 마침내 기다림이 되었다.
“오늘은 잘 지냈나요?”라는 평범한 문장이
하루의 온도를 바꾸는 마법이 되었다.
늦은 밤, 방 안의 불을 끄고 잠들기 전
그 사람의 한 마디가 내 하루를 정리해주는 순간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
그 목소리 너머에는 언제나 한 가지가 있었다.
진심.
나는 느꼈다.
우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낯섦도,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마음이 마음을 조용히 닮아가는 과정,
그것은 ‘관계’라는 이름의 씨앗이었다.
스며드는 시간, 머무는 계절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단골 카페에서 나눈 커피 한 잔,
스산한 날 민속주막에서 해물부추파전과 막걸리 한잔 ,
서로 좋아하는 에세이 글 한 구절을 공유하던 저녁.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쌓여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 사람은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말없이도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설명이 필요 없었고,
가끔은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대신했다.
서로의 취향이 닮아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작은 공감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무심코 꺼낸 기억에 그 사람이 따뜻한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그 미소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편안히 쉬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 걷고 있지만, 각자의 고요를 간직한 채.”
우리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의지하되 기대지 않고,
함께하되 얽매이지 않는,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동행.
기억은 빛으로 남는다
봄은 그렇게,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계절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따뜻했고,
예고 없이 왔지만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다.
무엇을 먹었을까,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까—
그 사소한 궁금함이
나를 더 부드럽게 만들고
세상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롯이 진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짧아도 진심이면 충분하고,
스쳐도 따뜻하면 그것이 곧 선물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그 사람은
나의 하루에 한 줄기 빛처럼 스며들어
어둠을 밝히는 온기를 남기고 갔다.
그리고 나는 바란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런 빛으로 남을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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